[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착한 목자는 상처입은 몸을 어루만진다”


교황의 산타 마르타의 집 강론 요지: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몸을 어루만진다

예수님께서 1인칭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다섯 개의 동사는 “최종 규범”의 기준을 나타낸다. 곧, ‘보다’, ‘부르시다’, ‘말하다’, ‘만지다’ 그리고 ‘치유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위선자”가 될 위험을 가장 먼저 무릅쓰게 되는 사목자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심판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몸을, 특히 고통 받는 사람의 몸을 손으로 만지라고 요청하시기 때문에, 미사여구와 멋진 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경고하신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10월 30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봉헌한 미사 강론을 통해 강조한 “착한 목자의 길”이다.

교황은 루카 복음(13,10-17) 구절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한다. “이 복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길에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토요일에 유다 공동체는 기도하러, 하느님의 말씀과 설교를 들으러 회당에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곳에 가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분이 권위를, 그것도 아주 큰 권위를 가지셨기 때문에, 한 말씀 하시도록 그들이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에는 허리가 굽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불쌍한 여인은 허리가 완전히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수년 동안 시달려야 했던 척추 질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동사들은 저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곧, ‘보셨다’, 그 여자를 보셨습니다. ‘부르셨다’, 그 여자를 부르셨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고 치유하셨습니다.’” 이것이 “가까움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동사입니다.”

먼저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착한 목자의 태도, 곧 ‘곁에 있음’입니다.” 왜냐하면 “착한 목자는 항상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착한 목자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다른 양들을 버려둘 정도로 잃어버린 양에게 ‘가까웠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더구나 착한 목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멀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의 표시입니다. 곧, ‘가까이 다가감’입니다. 그 대신에 다른 이들, 이 경우에 회당의 책임자, 사제들, 율법학자들, 몇몇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저명인사들은 백성과 분리되어 살았고, 하느님 백성을 계속 질책했습니다.” 여기서 교황은 다음과 같은 화두를 다시 던진다. “이 사람들은 착한 목자가 아니라, 자기 집단에 갇혀 있었고 백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종교예식이 끝났을 때, 헌금함에 돈이 얼마나 되는지 보러 가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중요했고, 정작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계시고, 늘 그렇게 계신다”고 강조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따라 ‘가까이 계심’을 묘사하는 장면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컨대 어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11, 33 참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비를 느끼시고, 가까이 다가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제 그룹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 ‘거기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자들, 병자들, 죄인들, 나병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앞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이 착한 목자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곳에 있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가까이 다가서고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질 줄 압니다.”

더 나아가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착한 목자의 세 번째 태도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픈 몸을 어루만지는 겁니다. ‘그분은 만지셨고’, ‘손을 얹으셨고’, 나병환자들과 죄인들을 만지셨습니다.” 다시 말해, “몸을” 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착한 목자는 ‘아, 네. 잘 지내시죠. 네, 그렇고 말고요. 제가 영적으로 가까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거리를 두는 것’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교황은 이렇게 주장했다. “착한 목자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당신 성자의 몸으로, 가엾은 마음과 자비를 통해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이 성자가 바로 착한 목자입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성부께서는 착한 목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곧, 자신을 낮추셨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고, 자신을 버리셨으며,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교황은 “이것이 착한 목자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성직주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이들은 과연 누구에게 다가갑니까?” 교황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현재 권력이나 돈에 항상 가까이 다가가는 나쁜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어떻게 권력에 오를지, 어떻게 권력과 친해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모든 것을 거래하거나 혹는 주머니만 챙기는 위선자들입니다. (...) 확실히 이 사람들에게는 백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주 적절한 표현, 여러 차례 이들을 향해 사용하셨던, ‘위선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이렇게 화를 냈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따를 뿐입니다.’ (...)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에 대해)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나쁜 목자들이 비난 받는 것을 보고 하느님 백성이 만족했던 것은 잘못입니다. 분명히 죄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들은 이런 감정을 잠시 ‘즐긴’ 만큼 혹독한 고통을 치러야 했습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착한 목자를 생각합시다. 보시고,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만지시고 낫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인류를) 가엾이 여기셔서 인간의 몸을 취하신 성부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이것이 착한 목자의 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복음 구절에서 착한 목자의 모습을 봅니다. 착한 목자를, 예수님 같은 목자를 갖는 것은 하느님 백성에게 은총입니다. 상처 입은 몸을 어루만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그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또한, 심판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 이하 참조)”.

마지막으로 교황은 이같이 결론을 내렸다. “’최종 규범’의 판단기준은, 하느님의 백성을 만지고 그들의 상황을 함께 나눔으로써, 가까이 다가감의 기준, 완전한 다가섬의 기준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맙시다. 착한 목자는 항상 사람들 곁에 가까이 다가섭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던 것처럼, ‘가까이’ 머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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